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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나  이 행                      적
1898년 20세 천봉산아래 청계동 옛집
안의사 교회활동에 헌신하다.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신부로 옮겨 청계동 본당이 설립되다.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안태건회장과 함께 교회일에 헌신하다. 안중근은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청계동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복사도 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하다.

안의사, 무법 일본인을 꾸짖어 승복시키다.

안중근이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어가다가 한 일본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을 탈취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하다. 이때 안중근이 그 약탈자의 얼굴을 치면서 권총을 뽑아 그의 배에 갖다대고 그를 크게 꾸짖어 승복시키다. 말 주인이 말을 도로 찾아서 간 후 그 일본사람을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이름을 알고자 하다.
1899년
1904년
21-26세 안의사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어려운 문제 해결에 앞장서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금광 감리 주가가 천주교에 대한 비방을 심하게 하여 교회의 피해가 커지자 안중근이 총대로 선정되어 주가를 힐문할 때 무기를 든 금광 일꾼 400~500명의 위협을 받고 간신히 벗어나다. 만인계(채표회사) 사장에 피선되어 출표식 때 기계 고장으로 군중 앞에서 수난을 당하였으나 함경도 사람 허봉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다. 서울사는 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군민의 돈 5,000냥을 빼앗아 간 일과 해주부 진위대 병영 위관 한원교가 이경주의 집을 비롯한 재산과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두가지 사실을 따지고자 상경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

안의사 대학설립을 건의하다.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양 수사회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을 설립하여 국내의 영준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하다. 이후 빌렘 신부로부터 배우던 불어공부를 중단하다. 조정에서 해서교안(海西敎案)을 사핵하고자 사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천주교회의 중요 인물을 잡아들이는데,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숙부 안태건도 포함되었으나 빌렘 신부가 감싸주었고, 안태훈은 몇달 동안 숨어다니다. 안태훈이 청국인 서가에게 봉변을 당하자 안중근이 친구 이창순과 함께 서가를 찾아가 따지고 외부에 청원한 결과, 진남포 재판소에 환부하여 승소판결을 받다. 후에 다른 청국인의 소개로 서가와 만나 화해하다. 교우들을 성직자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빌렘신부에 대항하여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하소하려 하다가 빌렘 신부에게 구타를 당하다. 이때 굴욕을 참고 신부에게 대들지 않고 곧 화해하다.
1905년 27세 안의사 중국 상해와 산동반도를 유심히 관찰하다.

신문, 잡지, 각국 역사등을 읽으면서 정치사상과 독립정신을 높이던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해에 국외 항일터전을 잡을 계획으로 출국하여 중국의 상해와 청도 등지를 두루 다니다. 상해에서 민영익을 2~3차례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상인 서상근을 찾아가서 구국의 방도에 대하여 논의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다. 처음에는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는 외국의 도움을 구하는 길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상해의 천주교당에서 우연히 만난 안면이 깊은 르각(한국명 곽원량)신부의 권유로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등 4가지에 힘 써야 함을 깨닫고 진남포로 돌아오다. 안의사 일가 교통 요충지인 진남포로 이사하는 중 부친이 재령에서 병사하다. 가족들이 청계동에 돌아가 장례를 치르다. 안의사는 상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듣고, 진남포를 떠나 제계(齊戒)를 지키기 위해 청계동으로 다시가 상례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그 해 겨울을 보내다. 이 때 안중근은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죽을때까지 지켰다. 이 해, 장남 분도가 출생하다. 그러나 1914년 망명지 북만주 무린에서 어릴때 일제에게 독살되었다.
1906년 28세 진남포에서 육영사업하던 시절의 안중근교장
안의사 일가 진남포로 이사하고, 육영사업에 헌신하다.

4월 안중근이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키고,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의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하다
1907년 29세 봄에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진사가 안중근을 찾아와서 간도, 노령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권하다. 안중근은 재정을 마련하고자 한재호, 송병운등과 함께 삼합의라는 석탄회사를 만들었으나 수 천원의 손해만 보다.

안의사가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평양의 상가
안의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이 무렵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 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패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안의사 서울에서 군대해산을 목도하고, 간도,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다.

8월 1일 정미 7조약에 이어 군대가 해산되어 시위대가 봉기하였을 때에 안중근은 국외활동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후에 다시 원산으로 향하다. 원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해삼위)으로 가려 했으나 청진에서 일제 임검경관에게 발각되어 하선하다. 이에 다시 육로로 함북 회령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다. 용정촌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를 3개월 동안 시찰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이미 그곳에 일제 침략기구인 총감부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여의치 못하므로 10월 20일에 연추를 지나 해삼위로 향하다.

안의사가 활동하던 무렵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연해주에서 조국독립투쟁을 시작하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항일독립운동에 큰 경륜을 펴기 시작 하였다.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에 대해 설득작업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엄인섭, 김기룡등과 의형제를 맺다. 이해 차남 준생이 출생하다.
1908년 30세 안중근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순회하면서 동의회 회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세작업을 벌이다.

이에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자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에 김두성, 총대장에 이범윤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다. 이들은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후 국내진입작전을 도모하다

안의사가 3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던 한중러 국경지대 지도
안의사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입작전을 벌이다.

7월(음력 6월), 안중근등 여러 의병장이 대를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 부근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으로 진공하다. 안중근 부대는 몇 차례 승첩을 올리고 일본군인과 상인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어주었다. 이 때문에 동료의병들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중에서 부대를 나누어서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석방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면서 기습공격을 받고 회령 영산에서 일군과 약 4~5시간 큰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다. 안중근은 수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열이틀 동안 단 두끼만 겨우 얻어먹는 등 곤경을 겪으면서 연추의 의병 본거지로 돌아가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는 동안 안중근이 2명의 의병에게 대세(代洗)를 주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의 재기를 도모했으나 여의치 못하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청, 하바로프스크 등을 순회하면서 각지 한인사회의 교육과 사회 조직 건설에 힘쓰다. 특히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 여리를 시찰하다. 그러던 중 어느 산골짜기에서 일진회 회원들에게 잡혀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풀려나 친지 집에서 상한 곳을 치료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이 무렵 안중근이 1906년경부터 1907년 초까지 진남포에서 운영해 오던 삼흥학교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진남포의 오성학교의 야학부로 재편되다. 8월 20일 황해, 평안 양도의 50여 학교 5,000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연합운동회에서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안중근이 재건에 힘쓴 진남포의 돈의학교가 우등을 차지하다.
1909년 31세 황병길과 백규삼
안의사 단지동맹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다.

3월 5일경(음력 2월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다.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하다. 단지혈맹동지 12명 안응칠(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안의사 '인심결합론'을 발표하다.

3월 21일, ‘해조신문’에 ‘안응칠’이란 이름으로 기서하여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방략에 대하여 논하다. 10월 초, 해삼위에서 소문과 신문을 통해 이등박문이 22일경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거를 결심하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쾌히 동의하다.

안의사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하다.

10월 21일, 아침에 안중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던중 통역을 맡아줄 유동하와 합류하다.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조도선을 찾아가서 함께 의거를 도모할 것을 동의받다.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에게 의거결행과 자금에 관한 편지를 쓰고 의거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이에 화답하는 ‘거의가’를 짓다.

안의사 일행 의거지를 선택하고자 채가구역으로 가다.

10월 24일, 아침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 정거장으로 나가서, 역의 관리를 통해 러청열차가 서로 바뀌는 정거장이 채가구 등지임을 알게되다. 유동하는 남아서 연락을 담당하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 역에 이르러 하차하다. 안중근 일행은 이등박문이 10월 26일 아침 6시경에 이 곳(채가구)을 지날 것이라는 사실을 정거장 사무원을 통해 확인하다. 10월 25일, 안중근은 의거의 만전을 위하여 채가구를 의거의 한 지점으로 정하여 우덕순, 조도선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얼빈으로 돌아와 하얼빈역을 의거지로 작정, 의거준비를 하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채가구에서 의거를 도모하려던 우덕순,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수상하게 여겨져,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에 그들이 투숙한 역 구내여관의 문을 잠궈 방안에 갇혀 있다가 의거에 실패하다.

안중근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 총살
안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살 응징하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안 찻집에서 이등의 도착을 기다리다. 오전 9시경 이등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코코프체프 대장대신이 열차내영접을 하다. 약 20분뒤 이등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다. 이 때 안의사는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을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3번 외치다. 의거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9시경에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지다. 치명상을 입은 이등은 곧 러시아 장교들과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20분 후에 69세로 절명하다.

안의사 일제관헌으로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구연효웅 검찰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안의사 관련 연루자와 함께 여순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이감되다.

11월 1일, 일본헌병과 러시아 헌병의 감시하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등 9인이 여순구 감옥으로 향하다. 11월 3일, 여순구에 이르러 감옥에 수감되다.

일본정부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의사 ‘사형’을 지령하다

12월 2일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이 현지 파견중인 창지철길 정무국장을 통하여 ‘중형징죄’를 전보로 명령 전달하게 하고 나아가 고등법원장 평석씨인을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개정을 다짐받았다.

안중근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 총살
12월 중순, 안중근의 동생 정근, 공근이 여순감옥으로 안중근을 면회 오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찾아온 두 동생을 4~5일만에, 혹은 10여일 만에 차례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한국인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과 천주교 신부를 초청하여 종부성사 받을 일들을 부탁하다. 또한 안중근이 자신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다.
1910년 32세 공판정을 가득 메운 방청인들
안의사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시되다.

1월 31일 ~ 2월 1일경부터, 일본의 검찰관과 옥리들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하고 안중근에게 공판개정일이 6~7일 뒤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하다. 또한 이미 허가한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으며,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통보하다.

여순공판 개정되다.

1910년 2월 7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진과십장의 단독심리하에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 하얼빈 의거 관련자 4인에 대한 제 1회 공판이 열리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진과십장, 담당검찰관은 구연효웅, 관선변호사는 수야길태랑, 겸전정치, 서기 도변랑일로 전원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하다. 이 공판에서 우선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네 피고인의 인적사항 확인 다음 안중근에 대한 신문이 전개되다.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다.

2월 8일 오전 11시, 제 2회 공판이 속개되어 우덕순과 조도선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이유를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겠으나 자신은 국민의 한사람 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다. 조도선은 정대호가 데리고 오기로 되어있는 안중근의 가족을 마중 나갈 때 러시아어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서 안중근과 채가구로 동행하였다고 진술하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다.

먼저 유동하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유동하는 안중근의 의거 의도를 몰랐다고 진술하다. 오후부터 재판장의 정기취조가 행해져 안중근이 이강에게 보내려던 편지와 안중근, 우덕순의 시가 러시아와 일본 관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 제시되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등박문죄악’ 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다.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 4회 공판이 시작되다. 구연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 조도선은 징역 3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다.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지다. 겸전 변호사는 주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해 변론하고 수야 변호사는 안중근에 대하여 변호하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적 간계를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등박문을 제거했다고 진술하고 자신을 단순한 자객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중에 잡힌 포로로 대접하여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라고 진술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 6회(최종판결)이 개정되다.

재판장은 일본 형법을 적용시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다. 이러한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다.

1910년 3월 8일,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신부가 찾아오다.

다음 날인 9일부터 10일까지 빌렘신부가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사성제대례, 예수의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행하다. 안중근은 이 미사 중에 직접 복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다. 이때 감옥소의 일반관리들도 함께 참례하다. 면회실에서 검찰관, 전옥, 통역, 간수장, 두 변호사 등이 입회하에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20분 동안 기도를 드린 후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안응칠역사
1910년 3월 15일,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하다.

안중근은 지난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92일만에 탈고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안중근은 ‘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등 한문 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하다. 안중근이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안의사에게 기념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하다. 안중근은 25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지막 면회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주교, 빌렘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전하다. 이 보다 앞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하다.

순국직전의 안의사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임형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 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고 이 자리에서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자 형 리들은 이를 제지하고 교수형을 집행, 안의사는 의연하게 순국하다. 안중근의 시신은 새로 송판으로 만든 침관에 안치된 후 여순감옥 묘지에 임시안장 되다 (그러나 순국 100주년까지도 시신을 모시지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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