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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의 어머니
안중근 어머니로서 뿐만이 아닌, 항일 독립활동가로서도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는 국망의 위기에 즈음하여 안진사가 사망하고 안 의사가 국내외에서 구국활동을 할 때 아들을 지원하였으며, 안 의사가 사형된 뒤에는 가족들과 노령으로 망명하였고, 임시정부수립 후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항일구국운동의 어머니로서 굳건하게 살면서 사랑을 널리 배풀었다.
독립운동가
집안간의 관계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될 만큼 깊었으며, 안중근 의거후 부인과 유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독립자사들의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명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0월에 송화군으로 강연을 나갔다가, 때마침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난 직후였으므로 공모의 협의를 받아 다시 투옥되어 몇 달 후 해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되었다.
일본정치인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행사.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켰으며, 1909년 통감직을 사임,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했지만 1909년 10월 26일에 만주순방중 하얼빈역에 내렸다가, 그날 오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독립운동가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포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의거성공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 10월, 조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마침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조국침략의 괴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갖고 우덕순, 유동하 등과 비밀리에 준비를 진행시키고 그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계획에 참여를 요청하자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은 2단계로 세워졌다. 즉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하고 그와 우덕순, 유동하는 열차의 교환지점인 채가구역에서 대기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일행도 일제의 수색으로 역시 피체되었다. 그는 1910년 2월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가
의거 당시 연락책임을 맡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도착할 예정임을 알려 암살에 기여하였다. 의거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 10월 노령 꼬트지포의 자택에서 부친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서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서명할 것을 요청하고 연서한 뒤 '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는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하는 일자 1909년 10월 26일 아침임을 확인하여 동삼성 채가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에게 전보를 타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 피체되어 1909년 11월 1일 안중근과 함께 여순감으로 이송되어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치인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의거 당시 동행하였으며 의거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단체 일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1908년 여름 의병대의 참모중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 회령지방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봄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이후 그는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되어 러시아 헌병대에 피체되어 여순에서 재판을 받고 이듬해 2월에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공판 당시 무료로 변호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의 거부로 변호하지는 못했다. 이후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1919년 3.1일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청년단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여 총재로 선임되었으며 1919년 9월 일제에 채포되어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어 망명하여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 2월에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의 통일기관을 설치했는데, 이 기관이 대한광복군이었고 이러한 대한광복군의 성립은 안병찬의 활동에 의거한 바가 매우 컸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가
군수업으로 쌓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하였으며, 안중근 의거후 그의 가족을 보호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 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이던 중 붙잡혀 살해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안중근의 가족을 천주교로 입교,세례를 주었다.
황해도 일대에서 선교활동 중 안태훈을 만나 청계동에 성당을 짓고 안의사 가족 전체를 유교에서 천주교 신자로 입교, 세례를 해주었다.
안의사로 하여금 개화사상과 민권의식을 갖게 했으며, 안의사가 사형언도를 받자 사형집행 전 여순감옥을 찾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내세를 기다리는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빌렘신부는 1909년 안의사 의거후 여순감옥에 수감 중 이등해 안의사가 사형되기 전 안의사 성사를 집전했다 하여 2개월간 성무정지를 당하고 1914년 프랑스로 돌아와 1938년 선종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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