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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안중근이 대한국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동기, 이른바 이토의 죄악 15개조이다. 안중근은 의거 당일 러시아 검사신문에서부터 일본 검찰관의 신문과 이듬해 2월의 공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토의 죄상을 이렇게 설파했다.

하얼빈 총영사관 지하실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 후 안중근은 결박된 채 11월 3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형무소로 이송 수감됐다. 여순은 행정 구역상으로 요녕성 대련시 여순구로 중국 북방 최대의 항구도시인 대련시의 6구 가운데 하나다.

일본이 러일전쟁 후 이곳에 즉각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총독의 지휘 감독아래 전옥을 두고 형무소를 관장하게 했다. 안중근이 여기서 수감중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동안 여러 자료에 나타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은 안중근에 대한 정중한 예우로 고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안중근 자서전에서 검찰관은 항시 나를 신문한 후 담배를 권하며 공정한 토론을 했고, 형무소장 구리하라와 일반관리들도 모두 친절을 베풀어 주어 고마웠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은 1909년 11월 4일 여순에서 두번째 검찰관 심문을 시작으로 그해 12월 26일까지 11번째 신문을 받았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심문태도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변해 갔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 의거의 정당성과 재판관할권의 애매한 입장 그리고 안중근의 돈독한 신앙심 등에 대한 배려로 안중근 형량에 대해 무기징역을 고려했으나, 일본 정부 내 강경파가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0년 2월 7일 마침내 공판 첫날이 다가왔다. 안중근을 비롯한 4명의 피고는 체포되던 당시의 복장 그대로 일본에서 들여온 마차를 타고 아침 일찍 여순감옥을 나섰다.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마차를 삼엄하게 호위했다. 이 날 공판정에는 우선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지들이 돈을 모아 보낸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해외동포들의 성금으로 보낸 영국인 변호사 더글라스 그리고 서울의 유지들과 안중근의 어머니가 보낸 안병찬 변호사 등이 참석했으나, 이들을 공판에 참여할 수 없게끔 한데서부터 공판은 공정하지 못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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