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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1907년 1월 31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회장 김광제(金光濟), 부회장 서상돈(徐相敦)과 대한매일신문 사장인 양기탁(梁起鐸)등 10여명이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서'란 격문을 전국에 돌리고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대동보>등 언론기관이 적극지원 함으로써 이 운동은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참여 하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도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나서 국채보상기성회를 평양에 설치하고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명륜당(明倫堂)에서 뜻있는 선비 1천여 명을 모아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모두 나설 것을 권고 했다.

한번은 일본형사가 관서지부를 찾아와 이 운동의 진전상황을 파악하려다 안중근과 충돌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안중근이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형사가 말하기를
'회원은 몇이나 되며 재정은 얼마나 모았는가?'
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회원은 2천만명 이고 재정은 1천3백만원을 모은 다음에 보상(報償)하려 한다'고 했다.
한인(韓人)들은 하등(下等)한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빚을 진 사람은 갚아야 하는 것이고, 빚을 준 사람은 빚을 받으면 되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공연히 시샘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그 일본형사는 화가 나서 나를 쳤다.

내가 이르기를
'이처럼 까닭없이 욕을 본다면 2천만 겨례들이 앞으로 더 많은 압제(壓制)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같이 밀고 쳤더니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운데 끼어 화해를 시켜 서로 헤어졌다.


안중근은 이 국채보상운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한번은 부인 김씨에게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장신구 전부를 헌납할 것을 요청하였다. 부인은 주저함이 없이 자기의 금은지환, 비녀 등 장신구들을 전부헌납하고 어머니와 제수들의 것은 본인들과 상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소식이 전파되자 관서지방의 일반민중들은 크게 감동하여 각 가정마다 다투어서 국채보상금을 상환하자는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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