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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를 응징하고 한국의 자주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쾌거였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잘못된 행동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규식, 안창호, 박은식 선생 등은 안중근을 한민족의 영웅이라고 격찬했지만 한민족 전체로 볼 때는 일부에 불과했다.

반면에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각국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가운데 그를 동양평화의 주창자, 전도사로 치켜세웠다. 한국에서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가 앞장 서 이토를 ‘한국의 은인’, ‘동양평화의 수호자’로 추앙하는 사태가 연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전국의 각 학교, 상점, 시장, 연예장 등에 휴업명령을 내려 이토의 죽음을 추모하도록 하였다.

11월 8일 장춘단에서 열린 이토 추도회는 황실·정부·민간 등 각계에서 참가한 가운데 1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그 중에는 5천여 명의 학생도 동원되었으며 사회 각층에서도 이토 추모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대한협회나 일진회같은 친일 사회단체들은 조사(弔辭)를 전달하는 한편 이토의 유족에게 조전(弔電)을 보내는 등 앞 다투어 이토 추모 행사를 벌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한국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발표하는 한편 이토의 ‘송덕비’를 건립하거나 ‘국민 사죄단’을 구성하는 등 망국적 행동이 여기저기서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당시 일반의 세평은 역사적 평가와는 너무나 극단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역사의 진실이 호도된 채 망발과 망언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 의거당시 외면 할 수 없는 국내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이토의 죄과를 지적하면서 외롭게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훗날 안중근의 날이 올 것’을 예견하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순국을 맞이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안의사의 의거를 접하고 그 뜻을 기려 다음과 같은 시(詩)를 읊었다.





박두진



박묵월



조지훈



조지훈



조지훈



김구



박정희



박은식



박은식



박은식



박은식



박은식



박은식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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