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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해외 독립투쟁지 탐방 참고(2010년도 6기 실시예정)
관리자 2010-04-09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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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97주년기념 대학생 해외탐방

- 안중근의사 해외 독립투쟁지 중국,러시아 편 -

 

안 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97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 는 2006년 7. 27일부터 8월03일 까지 7박8일 동안 대학생30명으로 구성된 안 중근의사 해외 독립 투쟁 지 탐방단을 구성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행동으로 조국 제단에 목숨 받친 청년 안중근의 해외독립투쟁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분 천추의 비원이던 나라가 독립 된지도 벌써 예순한 돌 !

우리 후손들은 그분의 마지막 소원이던 “국권이 회복되거든 내 뼈를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라는 말씀조차 이뤄드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러시아, 중국 땅 여기저기 독립투쟁의 혼과 정렬을 흩뿌렸던 역사의 현장을 청년 학생들이 눈으로 보고 발로 밟으며 오늘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탐방 길에 나섰다.

 

출발에 앞서 기념관 앞 영정에 장도를 비는 고유제를 마친 탐방단 30명은 백년의 시차를 넘어 청년 안중근과 오감을 맞추고 백두를 향한 첫걸음을 위해 속초항으로 출발하였다.

일제침략에 비분강개하며 투쟁의 여로를 떠나시던 의사님의 100년 전을 상기하면서 그분의 심정으로 동춘 훼리호 에 몸을 싣고 동해를 거슬러 러시아 땅 자루비노항 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가슴속엔 뭔지 모를 막연한 걱정과 탐방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스쳐갔다.

내나라 연안을 항해하지 못하고 일본쪽 공해상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되는 반 토막의 조국이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렇게 장도를 내딛었다. 저녁 식사 후 에는 처음만난 친구들과 얼굴을 익히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비록 손가락을 끊는 단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30단지동맹이 되어 청년 안 중근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의 하였다.

다행히 개관을 앞둔 노래방이 비어있어 거금 4만원이나 주고 빌려서 토론의 장소로 삼았다. 이 첫 토론은 김 광시 사무처장이 안 의사의 위대한 일대기를 소개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각각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유익한 자리가 되었다.

 

둘째 날 7.28일 08:30분에 러시아 땅 자루비노 항 에 하선하다

이 땅은 안 의사께서 100년 전 의병들을 이끌고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고 외치셨던 곳이다. 대한 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 작전을 펴시던 의연했던 청년장군을 회상해 보며, 비록 외양은 초라했을 지라도 세계를 품은 청년 장군의 원대한 이상을 함께 느껴본다.

러시아 국경 입국장에서 무려 4시간 이상 지루한 입국절차를 밟았다 사회주의의 비 능율을 체험하고, 100년전 의사님 께서도 이런 비 우호의 타국 땅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멸시와 차별을 견디셨을 것을 생각하니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길이 수난의 길임을 알면서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만을 염원하셨던 의사님의 간난의 시간들이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원초적 힘이 아니었을까?

후손으로서 무한한 감사와 대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다.

늦은 입국절차를 끝내고 서둘러 러시아식 점심을 먹은 후 러시아 핫사나 장군 동상이 서있는 크라스키노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이 땅은 천 년 전 우리 선조 대조영 이 세웠던 발해의 옛 땅 !

앞.뒤.옆 지평선 넘어 가물거리는 저 땅 들이 우리의 선조 들이 세웠던 발해 땅 이라니! 숨 막히는 감동으로 한참을 내려다보는 탐방단 의 가슴속엔 웅대하고 찬란했던 과거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 본다.

지금은 남의 땅 이지만 100년 전엔 우리 선조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이 황량한 벌판에서 독립의 웅지를 키워가던 투쟁의 땅!

국내로 진공하던 저 호령 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듯한데 나른한 이국의 한 여름 산하만 눈앞에 펼쳐져 세월의 무상함을 대변해 주었다.

독립투사들의 붉은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 러시아 연추하리 마을. 의사께서 죽기를 각오한 열한명의 동지와 함께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왼손약지 받쳐 들고 천추의 恨 대한독립을 태극기에 써넣으며 피로서 다짐하던 100년 전 대한 청년들!

훗날 국내진공 작전을 펴기 위해 이 산하 어딘가를 뛰며 동지들과 땀 흘려 훈련했을 말없는 대지

저절로 옷깃을 여미며 우리 모두는 후손된 도리를 다하자고 초롱 한 눈망울로 다짐한다. 우리가 바로 21세기의 세계의 주역이다.

 

지금은 본래의 하리마을을 찾아볼 수 없고 무성한 갈대숲 사이에 흔적조차 희미한데 100년 전 대한청년들의 거룩한 단지혈맹을 잊을 수 없어 몇 해 전 광복회와 우리숭모회가 만들어 세운 단지동맹비만 크라스키노 마을 어귀에 외로이 서있었다.

지키는 이 하나 없는 그 외로운 碑를 걸레로 닦고 잡초를 뽑는 우리 탐방단은 이곳의 주인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임 을 절감하였다.

인적 끊긴 황량한 단지 동맹 터를 뒤로하고 바쁘게 짜여진 일정 때문에 중국의 훈춘 땅으로 러. 중 국경을 급하게 넘어갔다.

 

훈춘! 간도라 불리는 한 세기 전 우리조상들의 삶터.

땀과 한숨이 배어있는 땅임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오래전 고향마을 다정했던 아주머니를 연상시키는 아줌마 들이 찐 옥수수와 강냉이튀밥을 손에 들고 “집에서 금방 삶은 거라요” 라며 사라고 조를 때는 수십 년 전 고향마을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비록 남의 땅 이나 아직도 우리민족이 삶의 터전삼아 한국말이 전혀 낫 설지 않고 오히려 지금의 우리보다 더 한국의 토속적 정감을 느끼게 해주어 더욱 정 겨웠다.

끝없는 만주의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훈춘시내 호텔에 투숙하니 중국에서의 첫날밤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 후 두번째 토론회는  여행목적 아닌 탐방길 이라도 이국에서의 첫 밤을 그냥 자기 에는 아쉬워 훈춘 야시장 을 둘러보았다

소란하고 북적이는 인파와 우리가 처음 접해보는 역한 음식들로 가득 찬 야시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이었고 누가 금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과일 외에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학생들 입에서 대한국인 임 이 자랑스럽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몇 해 전 TV에서본 북한의 꽃제비가 왜 연상이 될까? 시장이라서일까? 아직도 허기진 북한 동포들이 가여워 서 이다, 금년 수해는 더 극심하다는데 걱정이 앞섰다. 풍성하지만 질 낮은 시장 먹 거리를 바라보며 몇 천원 이면 실컷 먹을 수 있는 이 음식들을 우리 학생들은 입도 대지않는데, 같은 조상의 피를 나눈 반쪽의 내 동포 어린것들은 땅에서 주워 먹는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연민과 분노감이 치밀었다

아린 마음의 통증은 돌아온 후에도 한참동안 가시지 않는다.

 

셋째 날 은 기간 중 제일 빡빡하게 일정이 짜여 있는 날이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식사를 한 후 9시에 안 의사 가 1908년 7월부터 3개월 동안 묵었다는 “권하촌 ” 초가를 탐방했다 .작년까지 관리가 너무 허술하여 우리 숭모회 는 하얼빈시에 천 만원 을 기탁하며 관리를 특별히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맞는 권하촌 초가는 기대를 저버리고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아무리 타국 이지만 그 무심함에 억장이 무너지고 그 서운함이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자 와 현지 동포들에게 재삼 간곡히 부탁할 밖에 다른 대책이 없는 우리처지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 쓰러져가는 누추한 곳에서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거사1년전) 석 달 동안 머물며 독립투쟁의 전략전술을 짜내기 위해 하얗게 새웠을 그분의 고뇌의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국제정세는 원수들 편 이었고 조국의 국권은 침략자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불쌍한 동포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동.서.남.북 뿔뿔이 쫓기고 죽어나가던 저 망국의 시대, 살상의 현장에서

청년 안중근은 난세를 극복할 방법은 오직 목숨 건 투쟁밖에 도리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가진 것은  자신의 29살의 목숨뿐인 청년 안중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비장한 각오를 바로 이 현장에서 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잘 지어진 집도 아니고 특별 할 것도 없는 초가지만 그 안에서 조국과 2천만 동포를 위한 웅혼 의 거사를 계획하셨을 것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거룩한 초가 란 말인가?

이렇게 초라하게 방치 될 수는 없다. 우리 독립투쟁사의 성지로서 가꾸고 보존해야 될 것이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권하촌 초가를 뒤로하고 두만 강변에 있는 방천으로 이동하여 일안망 3국(한눈에 북한,중국,러시아 국경을 바라 볼 수 있다는 뜻) 이라는 3국의 국경지대를 바라보았다. 일제당시 안 의사께서 독립 운동하기에는 전술적으로 좋은 위치 였을것 같았다.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3국의 국경지대, 두만강이 국경선을 갈라놓은 방천지역.

저 멀리 남쪽에는 우리 평양이 자리하고 있을 터, 북쪽 국경의 한 자락에 서서 우리 탐방단은 조국통일의 절박성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그런데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옆에 중국의 방천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동해를 일본 해 라고 표지한 것 아닌가?

누군가 우리 동포가 일본해 부분을 펜으로 덧칠하고 “동해” 라고 써놓았다.

중국도 일제에 당한 것은 우리와 같은 처지면서 일본해라고 표지하다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역시 그들은 동해든, 일본해든 관심 없어 보였고, 동해는 오직 우리 들 만이 지켜야 된다는 것을 실감 하였다.

가까운 중국의 지도하나 바꿀 수 없는 우리 처지가 한심했지만 엄연한 국제 현실임을 직시 하고 이 사진에 셔터를 누르는 우리학생 들의 분개함이 한순간의 치기어림이 아닌 지속적 관심과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래본다.

 

방천을 떠나 다음 탐방지인 도문으로 이동하였다.

임진강 주변 과 닮아있는 이 땅의 역사적 배경을 보자

중국 청나라시대 조정은 누루하치의 탄생지라 하여 봉인하고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던 땅이었다. 근세에 와서야 우리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이 이 땅을 일구며 살아왔던 땅인데, 양국 조정에 들키면 목이 달아나는 일이었지만 변방의 가난한 우리 백성들은 목숨 걸고 두만강 사이를 도강하여 낮에는 간도에서 밭을 갈고 밤 되면 강안 마을로 돌아가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고난의 땅 이었다.

점점 도강 인구도 많아지고 간도 중심부 까지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터를 잡고 살아온 바로 한 세기 전 우리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며 엄밀한 의미로는 우리영토 였지만 일제가 간도협약을 통해 중국에 할양한 바로 우리 대한의 땅이다.

일제의 수탈을 겪으면서 우리 백성들은 문전옥답을 일제에 강탈 당 한 후 대대적으로 훈춘 연변 일대에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래서 간도 땅 어딜 가나 우리 민족이 뿌리박고 사는 것이다.

강변을 따라가다 보니 북한쪽 산정에 “21세기의 위대한 영웅 김정일 장군 만세 ” 라는 큰 글씨가 보였다. 가슴이 돌에 맞은 듯 먹먹 해온다. 산 아래 벗은 인민들은 삽과 광주리를 이고(복구장비는 보이지도 않음) 수해복구 에 한창인 답답한 산하에 누구 에게 저런 글귀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매스컴은 올해 북한의 수해가 극심하여 한겨울을 어떻게 지날 지 걱정들인데 영웅타령으로 수십 년을 허송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답답할 뿐이었다.

 

드디어 북한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도문 다리에 도착했다

우리 돈 천원이 귀중하게 쓰이는 곳 도문 땅, 주변상가는 몽땅 우리 동포들의 호객소리로 요란한데 강 위의 다리는 100년 전과 다름없고 북한 경비초소 너머 민가는 인적 없이 적막감만 더해주는 바로 저곳이 2천만 우리 동포가 살아 숨 쉬는 북녘 땅이라니!

다리 가운데 노란색 변계선 은 글씨마저 크게 써져 위압감마저 느껴지고 건널 수 없는 심정은 답답하기 만하여 내 동포 사는 북한 땅 이라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다리중간에서 기념 촬영하겠다고 줄선 학생들도 같은 민족에 대한 애정과 분단의 비감한 생각으로, 왜 남의 나라 발치에서 쳐다봐야 하는지 알기는 하는가? 안타까움만 서러움으로 북받쳐 왔다.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하여 연길의 용정학교에 당도했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배일시인 윤동주의 시비였다.

 

                                                                           - 서 시 -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그 낯익은 서정시에 피 배인 항일투쟁의 깊은 뜻이 올올이 박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우리들은 젊은 날 모두 암송 하며, 일찍 요절한 천재 윤동주 시인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또 한번 그들의 만행에 전율하였다.

이 땅에 사는 가난한 동포 자녀들이 우리와 함께 이 시들을 암송 할 수 있음에 안도하며, 우리에게 간도라 불리는 용정 땅 에서 남다른 애수와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한 핏줄이라서 일 것이다.

1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용정학교 校舍는 용정지역의 우리 민족 독립투쟁의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많은 국. 내외 동포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항일 투쟁의 산 역사를 보는 것 같아 경외 스러웠고 활동의 폭이 제한되는 남의 땅에서 조차 교육을 통해 많은 인재와 투사들을 배출했던 용정학교에서 우리 선조들의 교육열과 애국의 본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사함이 느껴졌다.

 

사진#17의 뒤편에 보이는 것이 역사관으로 사용되는 최초 校舍 이며 안에는 간도와 용정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되어있었다.

이곳에도 안중근의사의 독립투쟁 역사는 가장 큰 방에 전시 되어 안 의사의 독립투사로서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분의 많은 독립투쟁 활동들이 이곳 용정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현지동포들은 안 의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도록 이곳 용정학교 곳곳을 장식하였다.

한참을 둘러 본 후 선구자 노래의 첫 소절, 일송정 을 보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10여분 후에 도착한 일송정 자리는 현재 정자 하나만 덩 그라니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어서 일송정 이라 불렸는데 왜놈들이 우리의 독립정신의 상징물이 될까 두려워 고사작전을 폈다는데 그래도 건재 하자 급기야 소나무 몸통에 무수히 구멍을 뚫고 독한 고춧가루를 넣어 소나무를 말려 죽였다고 하니 그들의 악한 근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과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아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답사를 마친 우리는 100년 전 망국시대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가슴속 깊이 일송정을 불러보았다.

가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멀리서 바라보며 일~송정 노랫말을 읊조려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황 덕호 교수께서 길옆 어느 동포의 참외 밭에서 한보따리 참외를 사 나눠 주며 “이 땅의 독립투쟁 역사는 결코 잊혀 질수 없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 이며 우리가 오늘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화두를 던져주는 역사의 현장 이다” 라 고 우리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00년 전 이역 땅 멀리서 향수를 달래가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받친 안중근의사와 수많은 이름 없는 선열들을 향해 추모의 묵념을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이날 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연길의 대우 호텔에 여장을 풀며 “대우” 라는 익숙한 단어에 친밀감을 느꼈다

 

기분 좋게 한식 뷔페로 저녁을 먹은 후 “연변지역과 우리의 독립투쟁 역사”라는 주제로 연변대학 리 송덕 교수의 저녁강론을 듣는 귀한 시간도 가졌다.

리송덕 교수는 안중근의사에 대해서는 중국인들도 그들의 영웅 못지않게 극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단적으로 주은래 전 중국 수상은 1963년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항일투쟁의 시작은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 부터다” 라고 인정 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현재 말썽이 되고있는 고구려, 발해 역사문제도 같은 장소에서 확실히 한국의 역사라고 못 박았다. 안중근의사 에 대한 주은래. 개인적인 존경이 당시 중국 동북지방 고대사 고찰에서 한국역사로 인정 했던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재 중국당국은 동북공정 이라는 역사 패권 인식을 가지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자기들 의 역사로 편입 시도 하고 있는 이상 그 음흉한 포석을 용납할 수 없으며 결단코 용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 중국 정부와 학계는 주은래 수상의 객관적 역사관을 존중한다면 동북공정의 불합리성과 부당한 역사 왜곡임을 스스로 자각하여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다.

리송덕 교수는 우리민족이 웅혼했던 선조의 역사를 온전히 보존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남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 하면서

 

안 의사 의거는 당시 2천만 우리 민족뿐 아니라 4억 중국 인민들 가슴에도 항일의 깃발을 내리꽂는 투쟁의 시원이 되었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한. 중이 함께 모셔야 될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중국 신해혁명의 거두 손문을 비롯하여 원세개, 장개석 등 당시의 중국 정치인들이 안 의사 의거를 기점으로 중국에 산재한 우리 민족을 호의적으로 인정하고 독립투쟁에서 한.중 연대를 모색했다는 것은 안의사 의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할 것이다.

리송덕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부 앞서가는 역사 인식을 갖은 사람들을 향해 자제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역사는 역사일 뿐 현재의 국경에 역사적 사실을 접목 하는 시각은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발상이며 상호 논쟁의 소지를 감안하여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중국인(한족)들 에게 알려지면 남의 땅에 더부살이하는 우리 동족들이 미움 받을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주장 이었다.

일견 이해는 가지만 중국이 최근 국가차원에서 발해와 고구려 역사를 자기들 지방정부라 주장하는 동북공정 시도는 절대 동조 할 수도 없고 사실도 아니라는 우리 입장은 명확히 해야 될 것이다.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최근 연변의 옛 명동학교 (1909년 건립) 자리에서 대한의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진 개와가 나오고 안중근의사의 사격 훈련장 추정지가 발견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으나 유적지 여부는 앞으로 국.내 외 학자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결정할 차후 문제로 남겨두고 바빴던 하루를 마쳤다.

 

나흘째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보기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4시에 일어나 6시간을 달려 오전10시에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중국 동북지방의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차창 너머 주민들의 인상에서 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우리말로 의사소통이 가능 한 것은 물론이고,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가는 곳곳마다 長白山 이라 표지되어 우리는 어리둥절 하였으나, 가이드 말로는 우리 백두산을 중국인들은 장백산이라 칭 한다고 하였다. 어쩌다 우리 백두산을 반 조각내어 중국에 내주게 되었는지 근세역사의 아픈 과거가 더욱더 우리를 안타깝고 분노케 하였다

백두산 천지와 장백폭포 두 군데를 보기로 하고 먼저 천지에 올랐다.

중국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높은 곳 까지 차량이이동이 가능하도록 도로를 내고 셔틀 버스를 운행하며, 경사가 심한 마지막 등산로는 찦 차로 이동하도록 도로를 설치하였다.

군데군데 백두의 찢겨진 속살들을 보며 좀 더 환경을 고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쉴 사이 없이 왕복하는 차량들을 보며 왜 저 건너 북한쪽 백두산은 인적 없이 은둔하고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많은 관광객 들이 여건만 된다면 저 건너 북한쪽 백두산으로 갈 것 아닌가?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언젠간 그 돈이 북한 땅에 투자되어 굶주리는 저 우리 동포들에게 혜택 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천신만고 끝에 천지에 올랐으나 백두는 우리에게 자기 속살을 보이지 않고 안개로 감싸 신비감만 더해 주었다.

안개속의 천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550 여년전 조선 예종조 때 백두에 올라 시를 읊조리고 간신배들의 역모에 연루돼 이십대의 청년시절에 생을 마감한 남이장군의 시가 떠올랐다

 

白頭山石 磨刀塵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닳게 하고 )

豆萬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수로 말을 먹여 다 마르게 하리)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안케 못한다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후세에 누가 가히 장부라 하리요.)

 

이런 기상이 스무 살 무장의 머리에 떠오를 만큼 백두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 탐방 청년들 에게도 시공을 떠나 같은 감동이 있었기를 바라며 아쉬운 하산 길 차량에 몸을 실었다

장백폭포를 보기위해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폭포 앞으로 이동하여 멀리 보이는 폭포를 향해 한걸음씩 오르는 우리 탐방단 은 저 폭포수가 천지의 유일한 외부출로 라는 말에 씁쓸했다. 어찌 우리 천지의 물이 삼천리 우리강산이 아닌 중국에 활로를 열었을까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물을 먹고 쓰는 사람은 우리 동포들 이라는 것에서 위안을 삼아본다.

역시 백두는 큰 산답게 무쌍히 변화 하여. 비오고 바람 불다 청천하늘 보이기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장대같은 비를 쏟아 하산 길의 우리를 꾸중 하는 듯하였다.

다음 일정이 급해 허겁지겁 안도 역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 학생들은 혹여 나태 해질까봐 조별로 노래도 부르고 백두산 을 둘러본 얘기도 나누며 빗속을 3시간이나 달려 하얼빈 행 밤 열차를 타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탐방을 시작한지 닷새째!

역사의 현장 하얼빈 역에 오전6시30분 도착하였다

작년 까지만 하여도 안 의사님의 의거현장에 아무런 표지가 없어 안타까웠는데 금년 초 우리 숭모회와 하얼빈지회가 각고로 노력한 결과 안 의사님 의거시 저격지점과 피격지점에 빨간 대리석 표지판을 박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안 의사님 저격지점에서 사격자세를 취해보고 그날의 감동을 맛보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97년 전 청년 안중근으로 돌아가 본다.

 

땅! 땅! 땅! 2천만 우리민족의 분노한 총성

청년 안중근의 손에 들린 브라우닝 권총이 불을 뿜는다.

결행후 그의 두손은 “우라 꼬레~ 우라 꼬레~ 를 외치며 하늘을 가리켰을 것이다, 적진에 사로잡혔을 때 맨 먼저 무엇이 떠올랐을까?

 

우리조국 대한독립! 그리고 불쌍한 2천만 망국의 동포가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 연로한 어머니와 부인, 어린 자식들과 동생들 인간적 고뇌들이 교차 되지 않았을까 ?

아무리 대를 위해 서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식솔들을 버려야 하는 안타까움이 왜 없었으리요, 마지막 발길을 잡는 가족들의 슬픈 속삭임이 들리는듯하여 가슴이 아파온다.

우리 탐방 학생들도 97년 전 그 장쾌한 현장에서 총소리와 함께, 거사 바로직전의 숨 막히는 적막감도 함께 느끼며 청년 안중근의 고뇌와 의혈을 아낌없이 체험하였다.

하얼빈 시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빽빽한 탐방일정 대로 안 의사가 최초에 갇혔던 일본 영사관 터를 보고 지금은 초등학교가 된 그건물 지하실을 원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나라 잃은 국민의 97년 전 분노를 상기해 보는 탐방단 일행

 

조용한 묵상으로 그분을 기리면서 나라가 무엇이고 당시의 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던 당위성을 생각해본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습도도 높아 숨까지 막히는데 우리는 안 의사 관련 유적을 단 한곳도 빠뜨릴 수 없어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여 제홍교로 향했다.

 

안 의사님이 1909년 10월 25일 거사 하루 전에 현장을 답사했다는 제홍교에 서서 멀리 하얼빈 역 의거현장을 둘러보는 탐방단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숙연히 그 당시 정황 설명을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들이 장해 보였다.

하루 전 죽음을 각오하며 오로지 적의 심장에 분노의 총탄을 실수 없이 박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저 장한 우리의 영웅 안중근 !

단지 거사를 성공하겠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비오는 다릿발 위에서 한참이나 서서 그날의 감동을 체험하는 우리 대학생들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현재의 자리에서 현실에 맞는 충성이 무엇인지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오전 9시40분 하얼빈 공원 (현재는 李兆麟공원: 중국 항일투사 이름사용)에 도착하여 97년 전 몇 번이고 공원에 나가 거사를 계획하고 원수를 격살하겠다고 다짐하던 뜻 깊은 공원이다

명칭이 조린 공원으로 바뀌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떻든 그곳은 안 의사의 족적이 찍혔던 곳이고 그 고뇌의 숨결을 간직한 곳이 아니던가.

 

“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는 고국에 돌아가서 동포들 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도리를 다하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마지막 동생들을 면회 할 때 2천만 동포들에게 해준 최후의 유언에 나오는 그 하얼빈 공원이 바로 이곳이다.

그곳을 돌아보며 97년 전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곳저곳 거닐며 나라위해 목숨 바칠 것을 결심하는 안 의사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낄 수 있었으며. 바로 저 건너 어디선가 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하여 두리번거리게 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공원 한 곳에 안 의사님의 유묵 “靑草塘” 석비가 서있고 눈에 익은 대한국인 안중근 서 밑에 그분의 掌印이 각인되어 우리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그분의 동상이라도 세울 수 있으면 얼마나 더 뜻 깊을까 생각하면서도 중국정부의 배타적 성향에 미루어 이것만이라도 큰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석비를 세우기 위해 기우린 그동안 우리 숭모회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고, 하얼빈시 안중근의사 숭모회 지회관련자 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안 의사님의 하얼빈 의거 에는 김 성백 씨의 도움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얼빈 한인 회장이었던 김 성백 씨는 우라디보스톡 에서 안 의사와 상면 인사를 나눈 사이로서 하얼빈에 연고가 없던 안 의사 께서 거사 차 이곳에 와서 묵을 때 여러 가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유 동하, 조 도선 동지도 여기서 소개받고 러시아 어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집은 하얼빈 공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으로서 지금은 집터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오전 10시30분 하얼빈시 에 소재한 조선민족 예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하얼빈에 사는 동포들의 Korea Town 이라 할 수 있는 거리에 예술관을 만들어 안중근의사의 기념관 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안쪽에는 안 의사 동상이 서있고 안 의사의 주요 업적들을 형상화 하여 중앙에 설치하고 벽면에는 안 의사 연보 및 활동 사항 사진들을 부착해 놓았다.

최근 하얼빈시는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목표로 매년 한국주간 을 선정, 1주일간 우리 정치, 경제인을 중심으로 초청하여 한국관련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금년이 그 두 번째 로 우리 안중근의사 숭모회 안 응모 부이사장이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된 바 있다.

이렇듯 하얼빈시는 우리 안중근의사를 연결고리로 한국과 유대관계를 강화하려 하고 있으며, 전에 없이 조선민족 예술관 1층에 우리 안중근의사 관련자료 전시 및 동상 안치 등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런 일련의 조처는 우리의 경제력의 힘이 안 의사님 숭모활동에 까지 미친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민족 예술관을 탐방한 후 인근에 위치해 있는 고려회관으로 향했다. 고려회관은 하얼빈 거주 동포상인들이 자력으로 만든 전시관으로서 안중근의사와 관련한 자료 전시는 물론 조선족 동포들의 민족교육, 토론, 연극 등 을 하는 장소로서 하얼빈에 사는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고려회관 소장 자료들은 대부분 우리 안중근의사 숭모회에서 지원한 것들이라 낯이 익었다. 회관 건립을 위해 2004년부터 이곳 관계자들이 우리 숭모회를 찾아다니며 자료수집과 자문을 청하더니 결국 훌륭한 기념관을 꾸린 것 같아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곳이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훌륭한 교육관으로서 역할과 안중근의사의 기념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주기를 기원해 본다.

1층 전시실을 둘러본후 2층 회의실 에서 이곳 중국에서도 유명한 동포 홍 병용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우리 동포로서 중국의 로봇트 관련 학계의 최고봉 이라는 말에 놀라웠으며 그가 앞으로도 높은 명성을 계속 유지하기를 기원 하였다.

그는 앞으로 안중근의사 탐방사업의 의미를 한 차원 더 높이기 위해서는 답사뿐 아니라 중국 대학생들과 정례적 교류를 통해 그분의 애국, 애족, 평화 정신을 공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탐방단 대표 김광시 숭모회 사무처장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내년부터는 교류가 이뤄 질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즉석에서 공감을 표시하며, 양국 대학생들이 안중근의사를 매개로 한.중 결속을 다진다면 안 의사님이 100년 전에 꿈꾸던 한.중.일 3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차원의 평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양평화론 의 실천에 한발 앞서 갈수 있을 것 이라고 강조하며 적극적인 실천을 약속하였다.

하얼빈 탐방이 끝나고 숙소인 만방학교 로 이동하였다.

중국 땅 하얼빈에 우리 동포 자제 들 만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더구나 校舍의 훌륭한 시설이 우리 탐방단 의 눈길을 끌었다.

이 학교는 재미 실업가 임 해송 씨가 출연하여 설립한 학교로서 중국 전역에서도 모범적 사례로 손꼽히는 사립학교 이다

김원준 교장의 소개에 의하면 하얼빈지역 전체 중학교장을 대상으로 성공사례를 발표할 만큼 확실한 위치를 다졌으며 학업성취도, 인성교육, 학생들의 체력 등 모든 면 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였다.

이곳 만방학교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안중근의사 흉상이 있는 다음 탐방 지 원보산 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하얼빈 시가지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공원 묘지로서 조선족 숭모회원 故 박영길 씨가 수년전부터 사재를 털어 땅을 사고 안 의사 흉상을 설치한 곳이다. 아직도 봉안되지 못한 안 의사 유해를 대신하여 안 의사의 靈을 모시고 있으며 김좌진 장군. 신채호 선생의 靈도 함께 안치 되어있었다.

안타깝게도 박영길 씨는 금년 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안의사 유해발굴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 곁에 묻혀 그가 생전에 펼치려 노력하던 안 의사 숭모사업들은 이제 우리들의 과제로 남겨졌다.

시간이 부족하여 안 의사 흉상에 묵념하고 고 박 영길 씨 부인으로부터 경과 설명을 듣는 것으로 탐방을 마치고 돌아서는 우리들 마음은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다시 숙소인 만방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 하는 토론회를 마치고 지친 심신을 휴식하였다.

특히 이 기숙사는 우리 탐방단도 처음 보는 훌륭한 시설로서 이곳에서 우리 동포들의 자제들이 우리역사를 배우고 훌륭한 배달민족으로서 모자람 없이 육성되어 지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 탐방단 전원은 이 학교가 더욱 건실하게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학교 당국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탐방 6일차 우리 탐방단은 만방학교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학교를 둘러본 후 차이차거우(菜家溝)역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안중근의사께서 이등박문 을 반드시 격살하겠다고 각오한후 혹시 증기기관차의 물 보충을 위해 이역에 정차할수도 있음에 착안하여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동지와 함께 원수의 필살을 위해 하얼빈 역 남쪽에 있는 차우차거우 역을 거사의 후보지역으로 선정하고 우덕순

동지에게 맞겼던 간이역 이다.

지금도 차량진입이 불가한 간이역 차우차거우 역.

이곳을 답사하는 우리 탐방단은 이런 작은 역에서 거사를 앞두고 헤어지는 두 동지의 처연했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 본다.

안녕 우덕순동지여! 채가구 역을 지켜주오

행여 거사에 실패하실까봐 우덕순동지를 채가구 역에 대비시키면서 생애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울음 삼킨 묵언 “안녕 천국에서나 봅시다” 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리는듯하여 탐방단을 숙연하게 하였다. 간이역 채가구는 제땅이 그때에 얼마나 비장한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알고나 있으려나! 우리탐방단은 초라한 채가구 驛舍 직원에게 그날의 편린 한 조각이라도 들으려 하였으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심한 대답에 내나라 아님을 절감하였다.

그 당시 우덕순 동지가 역사에 달린 지하실에 묵었다는(강제유치라고 도 함) 장소를 보니 지금은 폐허가 되어 흙으로 막혀버렸다. 그 지하통로를 찍으며 당시의 슬픈 장면이 연상되어 숙연해 질수밖에 없었다.

답사가 끝나고 화장실을 찾는 탐방단들은 너무나 비위생적이어서 아무도 사용하지 못했다.

驛舍앞 에서는 노파가 시꺼먼 물에 계란을 쪄서 우리에게 사라는데 모두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경악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것을 먹을 수 있을까 의아해 하며 문득 10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본다. 우리의 안의사와 우덕순 동지는 저들에게 망국민 이며 이방인으로 괄시받고 무시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가슴이 아려온다.

지금 우리는 그들 앞에 당당하고 가슴에 새겨진 한글이 자랑스러웠으며 한문 필담조차 통하지 않는 저들이지만 한국 이라는 말만 듣고 엄지를 세워 NO1 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분 좋기에 앞서 이런 자랑스러운 대한을 만들기 위해 한 세기 전 우리의 안중근의사와 그 동지들은 목숨을 걸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그런 선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그들로부터 찬사와 부러움을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 할 때 다시 한 번 선열들의 목숨 건 투쟁에 외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최고의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 차이차거우 지역은 우리나라 면소재지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부여현 의 하부 행정구역

부여 ! 혹시 주몽 드라마의 배경이 된 부여는 아닐까? 소서노와 주몽이 격렬히 사랑했을 부여 땅. 고구려의 전신 부여. 지금 중국이 부여족(예맥족) 을 저희 중국민족이라고 하는 그 부여 땅.

하지만 어디선가 말 탄 주몽이 튀어나와 직계후손인 우리를 반겨 줄 것 같은 상상을 해보며 우리가 국력을 키워야 될 당위성을 생각한다.

그 옛날 고구려 이전에도 벌써 이 땅의 주인은 우리 선조들 이었다고 단정하며 남의 땅이 된 것을 안타까워 해본다.

광활한 대지 끝 간데 없는 지평선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일제의 악랄했던 인류 말살의 현장 731부대 터를 향하였다.

731부대 정말 인간이기를 거부한 그들의 악행을 보았다.

이 지옥의 현장에서 우리 독립투사들은 육신이 찢기우고 영혼까지 황폐화 되어, 망국의 투사로서 차마 잊힐 수 없는 치욕을 당했으리라.

나라가 없으면 개, 돼지 만도 못한 처지가 됨을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모두는 그 분노의 장소에서 조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고문 기구는 물론 인신의 내장을 걸어놓던 쇠고리를 보면서 저자거리에 전시된 구육 판매점을 연상하였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같은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자 들 과 한 하늘밑에 있을 수 없다는 철천 지 원한이 다시금 되 살아 났다.

육중한 철창문, 두터운 콘크리트 벽, 암울한 하늘. 이 모든 것들이 도륙의 현장을 에워싸고 악귀 같은 일제 병사들의 톱과 메스가 우리 독립투사들의 사지와 내장과 골수를 도려냈다니

아! 이 분노의 포효는 비록 한 세기가 지났지만 결코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외쳐본다.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제 인기몰이에 이용하고 일제만행을 사과한번 제대로 않는 저 고이즈미 를 필두로 한 철면피 일본 우익 들!

결코 온전하지 못하리라 그대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악귀들의 후예 일뿐. 그것도 인면수심의 아수라 들 이니라.

우리 탐방단 모두는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충혈 된 눈을 부릅떴다.

기차시간이 촉박하여 저녁을 허둥지둥 먹고 하얼빈 역 대합실에서 대기하는데 백두산을 다녀오는 상해거주 한족 관광객을 만났다. 우리가 한국의 안중근의사 항일 유적지 탐방단이라고 밝히자 그는 자신의 디지털 사진 영상을 보여주며 백두산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엄지손을 번쩍 들어 한국을 추켜 주었다.

형식적 인사라고 생각 하면서도 자랑스러움은 감출 수 없었다.

10시간을 넘게 만주 땅을 가로질러 밤 열차는 소리도 요란하게 안 의사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던 대련으로 향해 갔다.

이튿날 아침 6시20분 드디어 여순 감옥이 있는 대련 역에 도착했다.

아! 그분의 불꽃같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송두리째 간직한 땅 대련! 도착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숙연해 질수 있었다. 어쩌다 약소국의 이름 없는 촌부로 태어나 인생 20대 황금기에 조국과 민족 앞에 제물이 되어야 했던가?

그분도 사람이기에 엄청난 인간적 고뇌와 삶에 대한 애착이 왜 없었으리요. 대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드렸을지언정 부모형제 처자가 마지막 발길을 잡지 않았을 것인가?

우리탐방단이 출발에 앞서 단순 여행길 아닌 안 의사의 100년전 심정에 오감을 맞추고 왔기에 그분의 인간적 고민과 죽음을 담보한 참담한 마음을 지금의 나와 동일시 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공유해본다.

이 추운 중국 동북의 허술한 감옥 안에서 하루하루 생애의 끝 날을 가늠하며 인간적 비탄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과 애민의 염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했던 그 장부의 기개가 순국선열의 첫 번째 반열에 올림 받으셨지만 지금 우리의 섬김은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현지 여순 감옥에 도착하여 화 문귀 박물관장의 환영을 받았다. 지난 4월 남산 안의사 기념관을 참배한 화 문귀 관장에게 우리 숭모회가 환대한 결과인지 우리 탐방단을 맞는 중국 측 당국자들이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작년엔 사진촬영은 고사하고 한국말 까지 못하게 하던 현지 여행사의 주의사항이 생각났다.

우리 숭모회가 안 의사와 관련하여 중국 시정부, 중앙정부 와 일련의 협의 들을 가진 성과를 거둔 것이라 자부하며 당당하게 안 의사의 궤적을 따라 두루 체험하였다.

안 의사는 이곳에 영어된 후 소위 국사범이라 하여 독방을 썼던 것 같다. 1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리창 너머 독방에는 안 의사의 숨결이 느껴지고 손때 묻은 책상과 필기도구 들이 눈에 들어왔다.

후세에 남긴 200여점의 유묵들이 바로 이 장소에서 쓰여 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들은 이곳에서 안 의사를 파렴치한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부렸을 것이다. 협박과 회유 그리고 참혹한 고문 그 모진 수난을 받으면서도 대한국인으로서 한 치 허트러짐 없이 당당히 일제와 맞서던 청년 안중근

비록 짧은 생을 여기서 마감하지만 대한인의 기개와 의군으로서의 당당함이 여기저기 흔적들에서 느껴졌다.

마지막 순국의 순간에도 사형장에 배석한 일본인들에게 동양평화를 위해 다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주장하시던 위대한 모습이 형장의 올가미사이로 보이는 듯하였다.

만약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주장대로 일제가 침략 야욕을 접고 여순 지역에 한.중.일 3국의 평화지대를 구축 했더라면 태평양 전쟁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세례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동북아에 전쟁 없는 평화가 100년 전에 정착되었을 것이다.

우리 안 의사님이 얼마나 선각자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 의사 순국 장 옆에 안 의사 개인관련 기념관이 준비되어있고 그 한쪽에 통관 묘가 복원되어 있었다.

통관 묘는 이곳 사형장에서 교수형 시킬 때 바닥에 나무통을 받쳐놓고 시신이 떨어지면 덮개만 덮어 그대로 세운 채 땅에 묻었다는 관이다. 쭈그린 상태에서 묻힌 통관 묘를 보며 일제의 간악한 악행에 치가 떨려온다.

다행히 안 의사님의 시신은 일반 죄수와 다르게 침관을 쓰고 감옥 근처 묘지에 평장으로 묻었다지만 아직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우리 후손들을 부끄럽고 애타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작년부터 남. 북 이 합심하여 시신 발굴 사업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주변 지형이 너무 많이 변하고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움만 더해 주고 있다.

“내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라는 마지막 유언을 우리가 하루빨리 봉행 할 수 있도록 신의 가호가 있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여순 감옥 터를 둘러본 후 화 문귀 박물관장의 배웅을 받으며 인근에 위치한 여순 지방법원 터로 향하였다.

이곳은 우리 여순 순국선열 재단에서 관리하는 기념관 이다

기념관장은 탐방단이 도착하자 반가이 마지하며 여순 법원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안 의사 관련 영상소개와 전시물들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을 들은 후 전시물들과 복원된 당시 집기들을 둘러보았다.

안 의사의 재판을 주관했던 고등법원, 지방법원 장의 방 옆을 지날 때 는 거들먹거리는 일제의 주구들이 상상되어 그 사진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리 안 의사를 어르고 유혹했지만 우리 독립의 영웅 안 의사께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하게 이등의 죄악과 일제의 부당함을 외치셨으며, 동양평화를 위한 본인의 철학을 설파 하여 당시 일제의 고관들마저 마음속으로 의사님을 흠모하게 만들었던 장소이다.

불법 재판후 영국의 일간지 The Graphic은 기사에서 “재판으로 안중근은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이등박문은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가 되었다” 고 기사화 하여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린바 있다.

훗날 일본의 中野泰雄 아세아대 교수도 안 의사님의 하얼빈 의거를 두고 “죽은 자의 죄를 묻다”라는 저술을 남겨 죽은 이등방문에게 죄가 있음을 설파 하고, 당시 일본 법정에서의 안 의사 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즉 안중근의사의 거사는 군인으로서 적국의 수괴를 처단한 사안임으로 국제법에 의해 재판받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일제 법정에 세운 것 자체가 원인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아무리 제국주의가 판치던 당시의 국제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에서 재판권을 행사 해야 되었지만 노.일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제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안 의사를 일본에 넘김으로서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게 했던 것이다.

어떻든 안 의사는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부당한 재판을 피 할 수 없었고 조용히 순국을 받아드리며 “일본에는 사형 말고 더 큰 형벌은 없느냐?” 고 비웃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안 의사 모친 조 마리아 여사께서 “ 응칠아 의로운 일을 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마라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 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고 하던 말씀을 새겨봐야 될 것이다. 20대의 안 의사께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것은 어머니의 바른 가정교육이 있었음을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판장 재현장소에서 안 의사가 섰던 피고인석에 선 탐방단원 들은 남다른 감회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불법재판정에서 포효했던 안 의사님의 일갈 “ 나는 개인적으로 이일을 거행한 것이 아니며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국의 장수를 총살한 것이다. 만국공법에 의해 적에게 잡힌 포로로서 재판하라 ! ” 고 했던 그 우렁찬 호령이 들리는 듯 하였다.

우리 탐방단원들도 97년 전 안중근이 되어 재판장석을 응시하고 일제에 대한 분노에 찬 발언을 쏟아 내었다.

오늘 안중근의사 최후의 장소를 둘러보며 조국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우치고 100년 전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싸웠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 무엇을 받쳤는지

오늘을 사는 대한의 젊은 이 들로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사생관 을 가져야 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 인천행 배에 승선할 때 “안녕하세요!” 라는 훼리호 선원들의 인사는 마치 조국 땅에 돌아온 듯 안도감을 주었다.

바로 우리조국의 배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우리헌법이 적용되는 공간임을 새삼 상기하며 우리 모두는 조국에 앉긴 행복감을 만끽 하였다.

여기 저기 들리는 우리말들을 감미롭게 감상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든 한국말을 걸어보고 싶어 어디갔다오세요?, 어디서 오셨나요? 등 중요하지 않은 말이지만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는 우리의 속마음은 애국 충정으로 끌어 오르는 듯하였다.

10시간의 뱃길을 재촉하여 인천이 가까워지자 일주일간 멈춰있던 휴대폰의 명랑한 울림이 시작되었다

정말로 조국 대한민국에 당도 했구나 실감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대는 탐방단 들. 이렇게 뿌듯하고 즐거울 수가.

 

97년 전 안 의사가 꿈꾸던 조국 대한민국! 얼마나 자랑스러운 가 생각하며 한 세기 전 목숨으로 조국을 찾고자 노력하신 선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 지켜야 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인천항 입국장은 러시아 나 중국의 입국절차와 똑같았으나 지체 시간은 1/4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입국장 세관원에게 괜히 트집 잡아 보며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 입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외국 세관원들의 방자한 행동을 보았던 때문이리라.

입국절차가 끝나고 우리 탐방단 전원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으로 향하였다. 황인성 이사장 님의 영접을 받고 안 의사님 영정에 참배하면서

“장도를 안전하게 마치도록 도와주신 의사님 감사합니다.” 라고 머리 숙여 인사 한 후 “당신의 97년 전 삶과 죽음을 되새기고, 대한의 젊은이로서 당신이 그렇게 갈구하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짐하였다.

안 의사 영정은 떠날 때 나 돌아올 때나 변함이 없었으나 바라보는 학생들 마음은 불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잘못된 인식들이 미안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대한은 거저 세워졌고, 보릿고개를 얘기하는 부모세대는 군 내 나는 옛 세대의 청승쯤으로 치부하던 우리들.

오늘 비로소 대한민국이 거저 세워진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으며

한 세기 전 엔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와 피 흘려 싸웠고

반세기 전 6.25전쟁 때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렸으며

30년 전 굶던 시절에는 자식들의 풍요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자랑스러운 우리 부모 세대임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느끼면서

지금의 풍요 앞에 겸손함을 잃지 않을 것이고, 조국의 위기에 뒷짐 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受命) 이익 앞에서 의를 생각하고 위기 앞에서는 목숨도 바칠 줄 아는 의사님의 직계 후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새롭게 한다.

비록 안 중근 의사와 같이 위대하지는 않더라도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해 둔다.

 

대장정을 마치며 우리 탐방 학생 일동은 뜻 깊은 탐방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국가보훈처 당국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대한의 젊은이로서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 합니다

 

 

2006년 8월

 

안중근의사 숭모회 해외 독립투쟁지 탐방단 2기 일동

 

원래는 사진과 함께 작성된 문서인데 올리고 보니 사진은 간곳없이 글만 겨우 올라왔습니다.

너무 밋밋하여 읽으시기 불편하시겠지만 사진은 나중에 확인하여 올리겠습니다.

 

 

 


안의사 순국100주기 추모영상
2009. 6월 대한국인 안중근 오페라 공연 내용 3편입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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