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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5돌…항일의병장 유인석 선생 증손 유연창 翁
매일경제 기사전재 2010/08/16 2882

"독립투사 후손 자긍심으로 버텨…한국 이만큼 사는것도 그분들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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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을 지휘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의 증손 유연창 옹(오른쪽)이 조부 유해동 선생이 남긴 비망록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대학자셨던 증조부, 조부 모두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후손들은 일제에 의해 몰살 위기를 겪었고 교육도 받지 못했죠. 부귀영화는 꿈도 못 꾸고 모두들 어렵게 살아가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자긍심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광복절을 맞아 지난 11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만난 항일운동 지도자 의암 유인석 선생의 증손 유연창 옹(70). 자부심에 찬 눈빛이 형형했다. 유인석 선생과 함께 의병에 참여한 유중악 선생의 고손 유연오 옹(75)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가정리는 고흥 유씨가 400년 전부터 마을을 이뤄 살고 있는 집성촌. 1895년 의암이 마을 사람들과 제자들을 이끌고 일으킨 의병봉기의 발상지다. 일가들 상당수는 당시 의병 후손들이라고 보면 된다.

유연창 옹은 안중근 의사와의 일화를 시작으로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일제로부터 `대장이 누구냐`는 심문을 받았을 때 `김두성`이라고 답했죠. 김두성은 사실 의암을 가리킵니다." 유인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의암 유인석 선생은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항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항일 전쟁을 계속했다.

1910년에는 조선13도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로 추대됐다. 13도의군에는 이상설, 안창호, 홍범도 등이 참여했다. 1915년 만주에서 병사할 때까지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의병을 일으킨 유생 정도로만 알려진 유인석 선생은 사실 당대의 대학자였다. 유연오 옹은 "당시 의암은 지금의 이어령 씨와 같은 수준의 석학이었다"며 "율곡 선생의 학풍을 잇는 화서학파의 마지막 적통이었다"고 말했다. 모두에게 존경을 받으며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그가 53세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유연창 옹은 "당시 독립투사들이 항일운동에 투신한 것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의암 역시 유학자로서 `자존심이자 정신`인 상투를 자르라고 명령하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를 가만둘 수 없어 봉기했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말했다.

의암 유인석 선생 증손자인 유연창 옹이 증조부 묘 앞에서 묘비에 새겨진 비문의 의미를 취재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의암 유인석 선생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됐다. 그의 아들 유해동 선생도 아버지를 따라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유해동 선생은 광복 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으며 성균관대 상임이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가정리 유씨 일가는 한 명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일제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다. 유연창 옹은 "1900년대 초 의암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의암의 초가집에 불을 질러 불을 피해 뛰쳐나오는 남자들을 총으로 쏴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면서 "당시 상투를 풀고 있었던 할아버지(유해동)는 머리가 길어 일본군이 여자로 착각하고 살려줬다"고 말했다.

후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고 광복 이후에도 부귀영화는 생각지 못했다. 정부의 지원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유연창 옹은 "의암이 제자들을 이끌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는 동안 후손들은 초등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며 "대학자였던 의암의 학문을 잇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역사 교과서에서만 소개된 유인석 선생이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들어 유인석 기념관이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되고 춘천의병마을이 들어서면서다.

유연창 옹은 "의암의 후손들은 겨우 먹고사는 정도로 살아왔지만 국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갖지는 않았다"며 "부귀영화를 위해 의암이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정부가 유인석 기념관을 조성한다고 하자 유연창 옹과 일가들은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빚까지 내가며 돈을 보탰다. 유연창 옹은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원을 내놓기도 했다.

유연창 옹은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강성한 나라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선조 같은 독립투사들의 힘 덕분"이라며 "우리 후손들이 비록 덜 배우고 가진 것은 없어도 선조에 대한 긍지만으로도 떳떳하게 살아간다"고 힘줘 말했다.

매년 돌아오는 광복절이 유인석 선생 후손들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번에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발표한 담화에 대해 유연창 옹은 할 말이 많았다. "말로만 사과하는 건 의미가 없다. 교과서에는 여전히 국권침탈을 정당화하고 있고 독도가 일본땅으로 나와 있다. 모든 일본 국민이 한국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광복절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는 유연오 옹이 따끔한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진 나란데. 광복절의 의미도 모르고, 또 한국전쟁이 북침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참 답답하고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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