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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치 회고록'으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
연합뉴스 전재관리자 2010/08/26 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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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으로부터 최근 입수한 구라치 테쓰기치 (倉知鐵吉.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의 회고록『한국... /연합뉴스

조직적으로 ’倂合’이란 조어 만들어
처음부터 ’안중근 의사’ 처형 의도

구라치 데쓰기치(倉知鐵吉)의 회고록 『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지어냈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처형’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등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사실 등이 담겨있다.

회고록은 일본 ’외무성조사부제4과(外務省調査部第四課)’가 1939년(昭和14년11월)에 ‘비(秘)’문으로 구분해 발간했다.

서언과 ▲한국병합방침의 확립 ▲병합의 의미 ▲대한세목요강 기초안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씨의 ’회상록’ ▲이토공 암살사건 전후 ▲병합의 단행 등 7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문건은 2000년 6월 일본의 한 서점에서 출판됐으며, 현재는 입수 불가 상태이나 일본 국회도서관과 도쿄도립중앙도서관 등 일본 내 7개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구라치는 “세상에 전해지는 소위 한국병합의 진상에는 사실과 떨어진 점이 있어 이를 정정하고, 그 진상을 후세 역사가를 위해 여기에 작성한다” 회고록을 쓴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본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외교관인 구라치는 1870년 이시카와(石川)현에서 태어나 1894년 도쿄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같은 해 일본 내무성에 들어가 외무성 참사관과 독일주재 공사관 서기관 등을 거쳐 정무국장, 외무차관 및 제국의회 정부위원(政府委員)을 8차례 역임했으며, 1913년 사임하고 귀족원 위원으로 임명됐다.

특히 그는 조선통감부 서기관을 거쳐 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병합을 위한 외교문서를 준비한 인물이다.

회고록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병합에 찬성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애초 한일병합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회고록에 의하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이 나온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 가쓰라 총리 등은 내부적으로 한일병합 방침을 세운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하고,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의 방침에 따라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쥐고, 가능한 노력해 실력을 키울 것’이 그 요지다.

이 같은 원안은 가쓰라 총리와 고무라 외상만이 공유하고 극비에 부쳐졌는데, 이토의 의견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는 평소 조선에 대해서는 그 진의를 감추고 마음에도 없는 논의를 하는 경향이 있어,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9년 4월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은 마침 도쿄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대한(對韓)방침서를 보여주며 병합 실행 계획을 설명한다.

두 사람 모두 이토가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박 논리를 단단히 준비해 갔으나, 의외로 이토가 선뜻 동의하자 ’어안이 벙벙했을 정도’였다.

이토의 의사를 확인한 두 사람은 비로소 안심하고 이후 후임 통감인 소네 자작에게 대한방침서를 처음으로 보여줬으며, 극비상태를 유지하던 대한방침서는 7월 6일 각의에서 통과된다. 』



◇병합의 채택과정

『당시 한국을 일본에 합병한다는 논의는 많았으나,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한방침서에서도 ’한일합방’, ’한일합병’ 등 여러가지 방식이 혼동되어 쓰였다.

’합방’과 ’합병’ 모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구라치는 고심 끝에 이전까지는 사용된 적 없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다.

’합방’(合邦)은 ’두 나라가 완전히 동등한 수준으로 합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일합방이 이뤄질 경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합방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예처럼 국호가 ’대일본-대한제국’이 된다.

’병탄’(倂呑)이란 용어 역시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 제 것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침략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 자극적인 표현이라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구라치는 ’병합’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진 용어 ’병합’이 논란이 불러 일으킬 것을 우려한 구라치는 조용히 이 단어를 사용했고, 가쓰라 총리 등은 대한방침서를 읽을 때 병합과 합병을 혼동해서 읽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국내에서는 ’한일합방’이란 말을 많이 썼다”라며 “실제로는 ’병탄’이지만 용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 의도를 숨기기 위해 ’합병’이란 말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에서 재판받은 까닭

『일본 정부에서 한국 병합 방침 확정 후 실행까지는 절대 비밀을 유지한 가운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일어난다.

소식을 듣고 일본은 놀라 구라치를 한달간 뤼순(旅順)으로 보내 진상 조사와 함께 대책 마련을 지시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부 일본인들은 한국 황제가 이토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병합 추진의 근거로 활용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구라치는 도쿄에서의 판단과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간의 불온 한인 등이 계획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뜻이 알려져 병합 업무 추진에 지장을 초래할까 걱정한 까닭이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 관례대로 일본 본토가 아닌 뤼순에서 재판받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최 원장은 “1905년 맺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빼앗겼으므로, 해외에 있는 한국인의 범죄는 일본 사람과 똑같이 현지 일본 영사의 재판을 거친 후 일본 나가사키(長崎) 고등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했다”며 “그러나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유학해 법을 잘 알고 있던 법무장관 고무라 데타로가 외무장관과 상의해 안중근 의사를 뤼순에서 재판받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일본에서는 파렴치범에게는 사형을 내리는 일이 있었지만, 사상범은 사형을 내리지 않는 게 일관된 판례였다”며 “안 의사가 비록 조선인이긴 하지만 사법부는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 반대해 정부 압력에 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나가사키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대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려 사형을 면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뤼순에서 재판을 받게 되면 외무장관이 대법원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부 뜻대로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고 최 원장은 배경을 설명했다.

내각에서 결정한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자는 철저하게 처벌받는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외무장관이 직접 뤼순에 가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조정하고, 병합과 관련한 정보는 통감부에서 다루고 이토 히로부미 살해와 관련한 취조는 검찰에서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최 원장은 “한국 합방이 아니고 ’병합’이란 것이 일본의 기본 방침이었으며, 안중근 사건은 일본의 의도에 의해 축소된 사건”이라면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알고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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