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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륙을 깨운 총소리(上)
경향신문 2004/12/30 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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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94주기]안중근 의사를 다시본다 1. 대륙을 깨운 총소리(上) 
안중근(安重根·당시 31세)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당시 추밀원 원장·68세)를 저격했다. 10월2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사를 위해 하얼빈을 찾은 안의사가 하얼빈에 머무른 것은 10박11일. 그는 11월1일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된 이후 1910년 3월26일,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겨레의 뜨거운 마음은 의거 95년, 순국 94년이 되는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안의사가 하얼빈에 남겨놓은, 짧지만 영원한 발자취를 다시 한번 찾아갔다. 

▲1909년 10월22일(하얼빈 도착) 
하얼빈역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59년 재건했고, 80년대 증축해 예전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안의사가 의거를 기다렸던 역 구내 귀빈실 자리는 그대로다. 
안중근 의사가 처음 하얼빈역을 찾은 것은 오후 9시15분. 안의사는 우덕순(禹德淳·33)과 함께 그동안 활동하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온 것이다. 열차가 쑤이펀허(綬芬河)에 1시간 남짓 정차할 동안 그곳에서 독립 활동을 지원해주던 한의사 유경(劉京)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유동하(劉東夏·18)를 함께 데리고 왔다. 안의사 일행은 열차에서 내려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金成白·32)의 집을 찾았다. 김성백은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재 하얼빈 한국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유동하의 누이동생과 김성백의 막내 동생이 약혼한 사이였고 안의사와도 일면식이 있었다. 
김성백의 집은 레스나이가 28호다. "레스나이"는 러시아어로 "삼림" "삼림지대"라는 뜻으로 당시 목재 가공소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삼림가(森林街)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삼림가 28호는 없어지고 대신 하얼빈시 위생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80년대 도심 재개발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김성백의 집은 울타리가 있는 목재로 된 단층집이었다. 안의사는 이 집에서 의거때까지 머물면서 거사 계획을 짰다. 

▲1909년 10월23일(거사 준비 시작) 
안의사는 아침에 시내 구경을 한다며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삼림가 28호 앞길은 지금도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다. 집을 나오면 당시 하얼빈 시내 유일한 공원인 하얼빈 공원(지금의 자오린 공원)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의사는 이들과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의거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하얼빈 공원 서문에서 남북으로 관통된 거리 건너편에는 한국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고려가(高麗街·지금은 서8도가)가 있었다. 당시 하얼빈 인구는 2만명이었고 한국인은 268명이 살고 있었다. 고려가에는 한국인 초등학생 40여명이 다니는 동흥소학(東興小學)이 있었다. 안의사는 오후에 동흥소학을 찾아가 이 학교 교사이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海潮新聞의 후신)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던 김형재(金衡在)를 찾았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 조도선(曺道善)이 학교 부근의 김성옥(金成玉)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백의 집에서 안의사는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로 시작하는 "장부가(丈夫歌)"를 읊으며 거사 의지를 다졌다. 지금은 동흥소학이나 김성옥 집의 흔적은 없다. 모두 빌딩이 들어선 도심 거리로 바뀌었다. 동흥소학의 후신인 도리(道里) 조선족 중점소학은 지금 이웃에 있는 경위 4도가(經緯四道街)로 이전했다. 이영수(李英秀) 교장은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가 직접 찾은 학교라는 점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1909년 10월24일(거사 장소 이동) 
아침 일찍 일어난 안의사와 우덕순은 김성백의 집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의 하얼빈 공원에 들어갔다. 이들은 느릅나무가 우거진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했다. 안의사가 하얼빈 공원을 찾은 것은 불과 며칠이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유언을 통해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어달라”며 “조국이 독립하면 그때 유해를 가져가달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유언에도 불구, 그의 유해는 1910년 3월26일, 순국한 날 밤에 일본인 간수들이 뤼순 감옥 근처에 몰래 파묻어 현재도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안의사와 우덕순은 공원에서 상의한 끝에 하얼빈을 떠나 차이자거우(蔡家溝)로 가기로 했다. 창춘(長春)에서 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못미쳐 차이자거우 역에 내릴 가능성에 대비해서였다. 또 이토가 탄 특별열차에 대한 동향 탐지 목적도 있었다. 오전 9시 안의사는 유동하를 하얼빈에 남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차이자거우로 떠났다. 낮 12시쯤 차이자거우에 도착한 뒤 역 승무원을 통해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모레(10월26일) 오전 6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아냈다. 안의사 일행은 역 구내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의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하얼빈/홍인표 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2. 대륙을 깨운 총소리(下)
이 글이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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