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참여공간 > 보도자료


5.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
경향신문 2004/12/30 5900

 

동생 공근이 출생하다.1908년 6월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으로 일본군 공격에 나섰다. 두달전 경흥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 진지를 점령하는 승리를 거둔 안중근 부대는 또 다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0명 가까운 일본 군인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에 대해 석방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포로들에게 무기까지 돌려주었다. 의병들은 안중근의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일본군은 한국 의병을 생포하면 즉시 총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들어 포로라도 죽여서는 안되고 포로수용소가 없으니 석방할 수밖에 없다며 석방을 강행했다. 



포로 석방으로 안중근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석방을 놓고 의병들간에 갈등이 커져갔고, 부대를 이탈하는 의병들도 나타났다. 더 비싼 대가는 석방 포로들에 의해 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안중근부대는 참패했고, 이후 안중근 의병은 결성 1년도 안돼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안중근은 왜 의병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적군인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을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입각한 인도적 처리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로서 안중근의 면모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구국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다. 아버지 안태훈의 제의로 안중근은 조약 체결 직후인 1905년 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열강들에 조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여 국권을 되찾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중국에서 만난 르각 신부 등 천주교 유력인사들이 자신의 계획에 반대한 데다 아버지마저 병사하자 상하이 활동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그후 안중근은 평남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펼친다. 이 즈음 안중근은 프랑스인 빌렘 신부 등으로부터 일본 및 세계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동양평화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보, 대동공보 등을 읽고 민족주의 사상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평양에 자주 가면서 안창호 등 민족지도자들의 연설을 듣고 크게 고무된 것도 이 시기다. 

안중근은 뒷날 뤼순감옥에서 공술한 자료에서 안창호를 “교육발달을 꾀하여 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하려는 지사”라고 평가하고, 이상설에 대해서는 “동양평화주의자로서 이 사람만큼 친밀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없다”고 밝혔다. 안창호와 이상설 등으로부터 민족주의 및 동양평화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1907년 들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안중근은 국권회복운동에 본격 참여하게 된다. 이때 안중근은 이 운동의 관서지부장으로서 부인의 가락지·비녀 등 장신구까지 헌납할 정도로 국채보상운동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이 해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해산시키면서 조선 침략의 수위를 높여가자 안중근은 의병투쟁으로 독립전쟁 전략을 수정한다. 

안중근의 의병활동 투신은 동양평화를 저해하는 일본의 팽창주의 확산을 막고자 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 팽창주의의 중심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고 인식했다. 안중근이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이다. 이와 같이 나라가 기울고 백성이 지쳤는데 어찌 동양평화와 일본 국세가 안녕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훈계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일본군 포로 석방으로 안중근은 의병뿐 아니라 러시아 한인교포 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의병부대의 재정 후원자였던 최재형은 지원을 중단했다. 안중근은 의병의 재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새로운 전술을 모색한다. 

1909년 1월 러시아 연추에서 결행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결성은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 수호를 위한 비상한 조치였다. 안중근은 연추의 하리라는 마을에서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등 11인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 때까지 천신만고를 다해서 국사에 진쇄해야 한다”며 나라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어 이해 10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국의용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의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세계적인 의거를 단행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은 그의 천주교 신앙, 당시의 국제정세, 안창호·이상설의 교육·애국사상 등을 바탕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동양평화론을 자신의 신념으로 만든 것은 신교육구국운동-국채보상운동-의병전쟁-하얼빈 의거로 끊임없이 이어진 국권회복운동이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이토 저격 후 검찰관 신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 중 하나로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을 꼽았다. 또 공판정에서 하얼빈 의거는 ‘개인을 위해 한 게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한 거사임’을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자신이 구상한 평화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비록 사형 집행으로 ‘서’(序)와 ‘전감’(前鑑) 등 서론 부분만 쓰여진 채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동양평화의 필요성 및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 등 안의사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고 자신의 투쟁 이론을 ‘동양평화론’으로 정립할 만큼 투철한 사상가였다. 이토 저격은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투쟁해온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시리즈 끝 

〈조운찬기자〉 경향신문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Ⅳ-1 안중근의사의 가문
3. 안의사 보훈사업의 현주소
      


안중근의사기념관
숭모회 |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용약관 | 무단이메일수집거부 | 질문과 답변회원탈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