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 이후 항소도 포기한 채, 뤼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와 함께 동북아 평화구상을 밝힌 것이었다. 『안응칠역사』는 1879년부터 1910년까지 만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것이다.일제의 요구에 따라 저술한 것이기에 자신이 알거나 경험한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안응칠역사』에는 안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담대함과 위대함이 잘 나타나 있다.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내고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본인이 가진 평화사상과 그 방안을 후세에 남기려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現狀) ④복선(伏線) ⑤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동양평화론』을 통해 의거의 이유와 동양평화 구상을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시대를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한 러일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는 일제의 러일전쟁 선전포고문에 따라 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의 승전을 도왔음을 거론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패전하고 동양은 서양에 패하여 동양평화는 영구히 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공헌한 한·청 두 나라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한·청 두 나라 국민은 동양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승전한 후 곧 약속을 파기하고,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여 동양평화를 파괴하였는데, 그 원흉이 이토라고 보았다.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가 한국의 국권을 박탈한 주범이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원흉이므로 처단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안중근이 생각한 동양평화의 길은 어떤 것인가. 안중근은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한국·청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동양평화를 유지하지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는 뤼순을 중립지대로 정하여 한·청·일 삼국의 평화기구를 두고, 삼국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공동 은행을 설치하며, 삼국 청년들로 공동 군대를 만들고 상대국 언어를 습득시켜 우의를 다지게 하자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안중근 의사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