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9년 | | 02.15 | 이강이 설립한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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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03.02 | 김기룡 등 11인과 단지동맹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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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18 | 이토가 일본을 출발하여 요동반도 대련항에 도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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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19 | 안중근, 엔치야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
| | | | 이치권의 집에 머물면서 이토의 만주 방면시찰 소식을 들음. |
| | | 10.20 | 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함. |
| | | | 거사자금 100원을 이석산(이진룡)으로부터 강제 차용함. 우덕순 동지와 이토 처단 계획을 합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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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1 | 8시30분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남. 도중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를 |
| | | | 러시아어 통역으로 대동하고 10시 34분에 하얼빈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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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2 | 오전 9시 15분경 안중근 일행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유동하의 사돈 김성백의 집에 숙박함. |
| | | | 이토는 뤼순을 거쳐 봉천(심양)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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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3 | 안중근, 김성백 집에서 이토의 만주 방문 기사가 게재된 「원동보」를 읽음. |
| | | | 오전에 이발을 하고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중국인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음. 김성옥 집에 유숙하던 조도선을 방문, |
| | | | 정대호가 안중근 가족을 대동하고 하얼빈에 오는 것을 마중하기 워해 통역이 필요하다고 요청함. |
| | | | 이날 저녁 안중근 거사자금 차용과 관련, 김성백에게 50원을 부탁하기 위해 유동하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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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때 유동하는 갚을 방법을 요구함. 이강에게 거사계획과 차용금을 갚아 달라는 편지를 안중근, 우덕순이 연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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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4 |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함께 우편열차를 타고 남행, 채가구(지야이지스고)역 도착. |
| | | | 유동하에게 채가구 도착을 알리고 일이 있으면 전보를 치라고 타전함. |
| | | | 유동하, 이튿날 아침 이토가 도착한다는 내용을 전보로 보냄. 안중근, 우덕순과 이토 저격 거사에 대해 논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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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5 | 안중근, 채가구를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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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6 | 안중근, 7시경 하얼빈 역 도착. 이토 일행, 9시 15분에 열차에서 하차. |
| | | | 9시 30분 안중근,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하여 모두 명중시킴. |
| | | | 이때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떨어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세번 외침. 이토, 10시에 절명함. |
| | | | 안중근, 하얼빈 역 구내에서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조사받음. |
| | | | 러시아 당국, 11시 35분에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함. |
| | | | 11시 55분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 조도선 체포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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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27 |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안중근 재판을 관동도독부로 넘김.「대한매일신보」, 안중근 의거를 국내에 소개함. |
| | | 10.30 | 일 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1회 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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