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은 1918년 11월 동삼성(東三省) 길림(吉林)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던 대표 39명중 한사람으로 서
명하고 일제의 전제적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상해(上海)에서 창당하여, 이사장으로 서병호(徐丙浩)를 추대하였고, 김구(金九)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다.
919년 1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내조사원제(國內調査員制)를 실시할 때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정기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서 왕덕삼(王德三)과 함께 동삼성(東三省) 간도(間島)에 파견되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간의 군사통일조정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군사협회(軍事協會)를 조직하여 30명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중로(中露) 연합선전부(聯合宣傳部)를 조직하여 선전부장이 되어 간도 지방에 있는
일본 군경에 대한 정찰 및 전투를 하며 활동하였다.
1921년 간도와 혼춘(琿春) 지방에서 독립운동의 선전 및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활동을 하였다. 1921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방략과 편견
등을 조정하는데 주력하였다. 1922년 상해에 있는 중·한 호조사(韓·中互助社) 총사를 설립하고 영업과 간사가 되어 중국민과의 친화를 도모하며 한문으로 된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발행 및
그의 선전과 군자금 모집을 위주로 활동을 전개시켰다. 1922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같은해 신한청년당의 수뇌부들이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당내부
에 분열이 생기자 임시정부계열인 백범 김구, 김인전(金仁全) 등과 함께 탈당하였다.
1923년 10월 24일 상해 교민단 제4회 의원선거에서 본구역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에서 193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사업(造船事業)으로 위장하고 공작선(工
作船) 건조에 진력하는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홍콩(香港)으로 피신하였다. 1939년 6월 뇌병으로 고통을 받아 위해위 등 중국 각지를 이주하다가 은퇴생활을 하였다. 1949년 3월 17일
마침내 상해에서 뇌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은 1889년 안태훈 진사와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당시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던 중, 그 해 10월 그의 친형 안중
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사직한 후 형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여순(旅順)으로 갔다.
형 안정근과 함께 1910년 5월경 평양에서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고, 안중근 의사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의 근거지인 연추로 옮겨가 안창호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며,
1912년 6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나 경비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경에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1914년 9월에
김정국처단사건을 주도하였고 형 안정근과 함께 대규모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 후 1919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 밀파 외교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다시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임명되어 독립
운동에 대한 러시아의 후원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이동휘(李東輝)·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레닌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군자금 잔액 140
만 루블을 교부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2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 1926년 2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의 뒤를 이어 중국 상
해한인교민단장(上海韓人僑民團長)으로 임명되어 상해지역 한인들의 인권 보호와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 후 1926년 5월 상해에서 이유필(李裕弼)·최창식(崔昌植)·오영선(吳永善)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결성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인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론은 1926년 10월 중국 북경지역의 대독립당조직촉성회(大獨立黨組織促成會
), 1927년 4월 상해지역의 전민족독립당(全民族獨立黨)을 결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홍남표(洪南杓)·정백(鄭佰)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좌파 중심으로 조직할 것을 선언
하자, 참석을 거부하였음에도 전민족독립당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백범 김구의 재상해(在上海) 대표격으로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그 운영을 맡게 되었고, 프랑스조계에 있는 선생 집을 본부로 하여 한인
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을 진행해 나갔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 한인애국단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이를 비롯하여 1935년까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937년까지 한국국
민당(韓國國民黨)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주로 친일분자의 암살·처단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박찬익(朴贊翊)·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친일행각을 벌이는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장(上海韓國人親友會委員長) 유인발(柳寅發)과 옥관빈(玉觀彬)의 처단을 주도
하였고, 1935년 3월에는 흑색공포단원(黑色恐怖團員) 엄순봉(嚴舜奉) 등에게 항해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고문(顧問)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도록 지시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이와 함께 1934년 1월부터는 한인애국단원들과 함께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이청천(李靑天) 계열과 합동으로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분교에 한인군관학교(韓
人軍官學校)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1937년 8월에는 한국국민당 당원들을 대동하고 중국 상해로 잠입하여 친일파 한국인·중국인의 암살을 기도하는 한편, 중국측 편의대(便
衣隊) 본부와 함께 중국 각지에 산재한 항일신문사(抗日新聞社)를 방문하여 한중연합(韓中聯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2월 그의 장남 안우생(安偶生)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한국애국단 대표로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
國民會) 등 5개 단체, 중국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 등 8개 단체와 연명(連名)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동월 17일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조직하여 1938년까지 활동
하였다. 또한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상임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이래 1940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의 평생에 걸친 독립운동을 특징짓는 것은 특무공작이다. 선생은 20대 중반에 둘째형을 도와 일제밀정을 처단하였고 30세에 러시아 우수리스크 일대의 결사대원들에게 제공할 무기를 구입
하여 산속에 숨겨놓기도 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반에 김구와 함께 이봉창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엮어낸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1939년 5월 30일 중경에서 홀연히 실종되어
현재 그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동생으로서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나, 7살이 되던 해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어린 시절 사촌형 안중근과 함께 성장하며 화서학파의 거유
고능선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으며 당시 청계동으로 몸을 피해 잠시 머물던 백범 김구와도 만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와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의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사건이 있은 후에,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안명근은 원대한 계획에 의한 독립운동을 추진해 갔다.
안명근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명근은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독립운동 계획
에 함께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등 동지를 규합하여 무장·의열투쟁을 추진하고자, 먼저 무기를 구입한 뒤 준비 단계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서 안악·신천의 부호를 찾아 1만원가량의 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는 1910년 11월 18일 송화(松禾)의 신경천(申敬天)에게 5천원을 요청하여 3천원을 받고, 11월 30일 신천의 이원식(李元植)에게 1만원을 요청하여 6천원을 받았다. 11월 21일
신천의 민(閔) 모에게 2천원을 요구했다가 준비해 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으나, 민이 일제 헌병대에 밀고하여 1910년 12월에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명근이 모집한 군자금을 맡아 두었던 배경진(裵敬鎭)을 체포하여 군자금 9천원을 압수하고, 안명근의 계획에 찬동한 바 있는 원행섭(元行燮) 등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안명근사건」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신민회 황해도 지회를 탄압하기 위해서 김구 등 무려 160여명을 체포 투옥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안악사건」이다.
일제는 또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했다고 해서 1911년 1월에 신민회의 중앙간부들인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들을 체포
투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이다.
일제는 또한 신민회라는 비밀결사가 일제총독 사내정의를 암살하려는 기도를 했다고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검거하고 이미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에 의하
여 투옥된 신민회 간부들도 재기소하였다. 이것이 일제가 말하는 이른바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 하는 통칭 「105인사건」이다. 이 세 사건이 모두
「안명근사건」과 연계되어 일어났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하여 1911년 7월 22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4년, 15년 만에 가출옥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
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길림성 의란현(依蘭縣) 팔호리(八湖里)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경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사람이다. 1918년 망명의 길을 떠나 사촌형 안중근 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박은식(朴殷
植)·안정근(安定根)·신채호(申采浩)·이범윤(李範允)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인하여 자주독립운동에 어려움이 가중됨으로써 상해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와 의기투합함으로써 그를 적극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1923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사천성(四川省)의 노주군관학교(瀘州軍官學校)에 입학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1925년에는 운남군관학교(雲
南軍官學校)를 마쳤으며, 그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권 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
金昌煥)의 참모로 들어가 독립투쟁에 종사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등 3부 통합운동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그만큼 독립투쟁의 역
량을 저해·약화시킨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얽혀 통합에 실패하고 남만주의 국민부(國民府), 북만주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양립되었다. 이곳은 일제의 밀정과 일본군, 그리고 공산주의자가 포진하고 있어
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 등이 그 피해를 입었다. 김좌진이 암살당한 것도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만주 일원에서의 독립투쟁이
불리해지고 압박도 받자 안전지대인 국제도시 상해로 돌아와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그는 김구·이동녕(李東寧) 등 임정 요인과 협의하고 황포군관학교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로 침체국면에서
허덕이던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촌 형 안공근의 노력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가 개교됨에 따라 직접 학생을 훈련시켰으며 남경(
南京) 등지에서 군관생도(軍官生徒) 모집에 주력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재호한국독립당대회에 참석하였다. 이해 5월 그는 상해거주 한인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혀 오던 일본총영사관 소속의 친일파 주구인 밀정 이종홍(李鍾
洪)을 교살함으로써 한인들의 맺힌 한(恨)을 풀어 주었다. 이듬해에는 남경에서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였다. 한편 동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특무대(韓國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여 대장에 김구, 참모장에 안공근을 선출하였으며, 그 자신은 군관학교 졸업생 등과 함께 대원이 되었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김구와의 연락책임을 맡아 한·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6년 11월 10일의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황해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
며, 임시정부가 사천성(四川省) 기강현으로 이주한 후인 1939년 10월에 다시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되어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약
하다가 광복으로 귀국하였다.
안경근은 귀국 후 김구의 그림자 노릇을 했을 뿐 공식적인 활동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8년 3월 27일 김구가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결정하자, 안경근은 권태양과
함께 김구, 김규식의 특사로 선임되어 북한에 직접 가서 김구와 김규식의 의사를 전달하고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북한 당국자의 진의를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안경근은 가족과 함께 서울에 남아 숨어 지냈다. 이후 1.4 후퇴 때 가족을 데리고 안양, 인천을 거쳐 대구로 내려갔고, 이후로 23년간 대구 대봉동에서 살았다. 195
0년대 후반 반독재, 민주화 움직임과 평화통일 논의가 대두하자, 그는 지인들과 친목회를 결성해 시대흐름에 부응하고자 했고, 4.19 혁명이 발발하자 1960년 4월 말 대구 시청 회의실에서 민주
전국동지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엔 혁신정당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애국선열, 지사 및 유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60년 11월 26일, 안경근은 민주전국동지회를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으로 확대 개편했다. 연맹 위원장엔 안경근이 선임되었고, 조카 안민생이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그리고 1961년 3월 1일
에는 대구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서울로 상경해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살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중단하
고 은둔 생활을 보냈다. 1978년 6월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로 이사한 그는 6개월이 지난 12월 9일에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장흥면 일영리 구만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정부에
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로 황해도 벽성군 금산면 냉정리에서 성장했다.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남경(南京)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임관되어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1939년 10월에 중국군 육군 소령으로 군정부 감호대대(軍政府監護大隊)에서 복무
하였다. 1940년 6월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산서(山西)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이준식(李俊植)·노태준(盧泰俊)·서파(徐波)·이영화(李英和) 등과 함
께 특파단원으로 파견되었으며, 동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되자 제1지대는 산서성 대동(山西省 大同)을 근거지로 하여 하남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을 활동구역으로 하였는데 그는
제1지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그는 다시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에는 주영지대장(駐寧支隊長)으로 조국 광복에 이바지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에
서 훈련부장을 맡았다.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8보병사단 사단장, 국방부 차관보 등을 역임하고 196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
다. 예편 이후 대한중공업 이사장 서리, 인천중공업 사장 등을 거쳐 1973년부터 1979년 초까지 국회의원도 지냈다. 초대 독립기념관 관장, 제5대 광복회 회장, 대한노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정
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최익형은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 안명근의 매제로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제가 「안명근
사건」을 확대해서 1911년 1월 황해도의 신민회 회원을 일제히 검거할 때(안악사건) 최익형도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5년간 복역하였다.
1921년에 임시정부 적십자회장인 4촌 처남 안정근으로부터 임시정부 자금모집을 의뢰 받고 나태섭(羅泰燮) 등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일부를 임시정부로 보내고
계속 모금활동을 하던 중 1921년 8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4년에 비밀히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로부터 김구의 가족을 상해로 보내라는 의뢰를 받고 귀국하여 안악에 거주하던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아들 김신 등을 김선량(金善亮)으로 하여금 호송
하도록 자금을 제공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